구마 겐고와 약한 건축
[목차]
01. 새로운 시대의 질문, 왜 ‘약한 건축’인가?
02. ‘강한 건축’에 반기를 든 이유
03. ‘약함’을 설계하는 방식: 재료, 기술, 관계
04. 지속 가능성을 넘어선 ‘죽음’의 건축
05. 건축, 더 약해져야 하는 이유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건축가 구마 겐고가 지난 5월, 서울에 한국 지사를 설립하고 설계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국내 행보에 나섰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세계 곳곳에서 활동해 왔지만, 이제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약한 건축(weak architecture)’이라는 철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콘크리트와 유리로 가득 찬 도시 한복판에서, ‘건축은 정말 지금처럼 강해야 할까?’라고 그는 되묻고 있는 듯합니다. 기후 위기와 도시의 과밀화,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건축의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구마 겐고가 말하는 ‘약한 건축’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그가 제안하는 ‘약한 건축’이 담고 있는 철학이 무엇인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01. 새로운 시대의 질문, 왜 ‘약한 건축’인가?
20세기 이후의 건축은 강했습니다. 콘크리트, 철근, 유리 같은 산업적 재료들이 도시를 지배했고, 높고 견고하며 폐쇄적인 구조물들이 근대의 이상을 구현해 왔습니다. ‘튼튼한 집’은 단지 안전한 공간을 넘어 부와 지위를 드러내는 도구였고, 건축가는 사회를 선도하는 영웅처럼 건축은 크고, 무겁고, 단단할수록 좋다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러한 ‘강한 건축’은 더 이상 우리의 삶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점점 심화하는 기후 위기, 파편화된 공동체, 도시 공간에서의 소외는 기존 건축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구마 겐고는 ‘약한 건축’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약함’은 구조적으로 불안정하거나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경에 순응하고 사람과 관계 맺는 열린 건축, 재료의 본성과 감각을 되살리는 건축을 뜻합니다. 강함으로 군림하기보다, 약함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태도인 셈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나, 건축가 구마 겐고』(안그라픽스)에서 “콘크리트에 의존해 만들어진 무겁고 영원할 것 같은 건축”이 싫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02. ‘강한 건축’에 반기를 든 이유
모더니즘은 20세기 공업 사회가 만들어낸 건축 양식입니다. 콘크리트, 철, 유리를 바탕으로 한 이 건축은 기능적이고 효율적이었으며, 하나의 ‘제복’처럼 세계 도처에 반복되었습니다.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같은 거장들이 이를 주도했고, 유럽에서 시작된 이 스타일은 미국을 거쳐 세계적 표준이 되었죠.
구마 겐고는 이러한 모더니즘 건축이 ‘장소와의 관계’를 단절시켰다고 지적합니다. 예컨대 르코르뷔지에의 대표작인 ‘빌라 사보아’는 파리 외곽의 녹지에 지어진 주택이지만, 대지를 떠받치는 ‘필로티’ 구조가 적용되어 주변 환경과 분절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어디서나 반복 가능한 건축’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장소성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20세기 세계 공통의 건축 언어로 자리 잡으며, 자연을 대체하고 감각을 표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구마 겐고는 “콘크리트의 시간은 콘크리트가 굳어지면서 완결”되는 반면, “목조의 시간은 건물이 완성되면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썩기도 하지만, 정성껏 보수하면 콘크리트보다 더 오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콘크리트가 마치 영원할 것 같은 불로불사를 상징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연을 거스르는 ‘종말적’인 재료라는 것이죠.
이처럼 그는 20세기에 반기를 들고 ‘장소’라는 개념으로 돌아갔습니다. 1990년대 도쿄의 버블이 꺼지면서 지방의 장인과 재료를 찾아 떠난 여정은 구마에게 ‘장소에 뿌리내린 건축’의 가능성을 일깨웠습니다. 돌, 흙, 나무 같은 재료들이 건축의 본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계기였습니다. 그의 전환점을 마련한 중국 베이징의 ‘대나무집’ 프로젝트는 대나무라는 약한 재료를 가능한 모든 부분에 사용하자는 과감한 실험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대나무는 잘 썩고, 두께가 일정하지 않으며, 다루기 까다롭지만, 구마는 오히려 그 속에서 ‘자연’의 속성을 읽어냈습니다. 완벽하고 동일한 것을 추구하기보다, 불완전함 속의 조화를 건축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03. ‘약함’을 설계하는 방식: 재료, 기술, 관계
그렇다면 ‘약한 건축’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재료의 선택과 사용 방식입니다. 구마 겐고는 콘크리트나 유리 같은 현대적 재료 대신, 나무, 흙, 종이 등 자연과 가까운 재료를 선호합니다. 단지 전통적인 감성을 되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재료 고유의 감촉과 숨결을 통해 인간과 환경 사이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건축을 자연의 일부로 환원하고, 재료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지역의 기후와 맥락에 따라 ‘사라질 수 있는 건축’을 지향합니다. 목재, 흙, 종이, 대나무 등 그가 자주 사용하는 재료들은 자연에서 왔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순환성을 품고 있죠.
예컨대 그는 나무를 기계적으로 가공하지 않고, 중첩하고 엮어가며 쌓아 올립니다. 완벽한 대칭을 따르기 보다는, 유기적인 형태를 통해 자연과 더불어 존재하는 건축을 만들어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도리’라는 프로젝트입니다. 이는 가는 나무 막대기를 바늘이나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서로 물려 삼차원 격자를 만드는 방식으로, 단 세 개의 막대를 조합하는 단순한 원리를 반복해 큰 구조물을 완성합니다. 구마 겐고는 이 기술을 이탈리아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에서 선보인 후, GC프로소뮤지엄 리서치센터를 비롯한 다양한 건축 설계에도 발전시켜 적용한 바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약한 건축은 사용자, 지역, 환경 간의 다층적인 연결을 지향합니다. 단절된 내부 공간이 아니라, 외부와 연속적으로 연결되는 구조. 벽이 아니라 틈, 경계가 아니라 흐름을 만들어내는 설계는 구마 겐고가 지속적으로 실험해 온 방식입니다. 책 『나, 건축가 구마 겐고』(안그라픽스) 마지막을 장식한 “인간은 매우 약하기 때문에 건축을 합니다. 동료와 함께 말이죠.”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존중과 믿음을 잘 보여줍니다.
04. 지속 가능성을 넘어선 ‘죽음’의 건축
‘약한 건축’은 흔히 지속 가능성과 연결되곤 합니다. 물론 목재나 흙 같은 재료는 친환경적이며, 지역 자원을 활용한 설계는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한 건축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지속 가능성’을 다시 묻습니다. 구마 겐고가 말하는 지속 가능성은 단지 오래가는 건축이나 에너지 절감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생명의 흐름을 포용하는 건축, 즉 죽음을 수용하는 건축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되돌아감’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자연에서 온 재료가 자연으로 되돌아가듯, 건축 역시 언젠가 해체되고 소멸하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은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유기적 순환의 질서를 따릅니다. 그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배워야 할 ‘지속 가능성’의 윤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건물을 지을 때, 처음의 반짝이는 상태보다 시간이 지나 색이 변해가는 상태, 썩기 직전의 모습까지 떠올리며 설계에 임합니다. 이는 단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시간과 소멸, 그리고 자연에 대한 경외를 잊게 만드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콘크리트가 만드는 건축은 돌이킬 수 없는 건축이라면, 약한 건축은 소멸을 전제로 지속되는 건축, 다시 말해 ‘죽음으로 이어지는 건축’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며 자연과 함께 사라질 수 있는, 그래서 생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드는 건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05. 건축, 더 약해져야 하는 이유
약한 건축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의 전환입니다. 지금까지의 건축이 ‘기능’과 ‘효율’을 중심에 두었다면, 약한 건축은 ‘관계’와 ‘맥락’을 중심에 둡니다. 공간이 존재하는 방식, 시간이 쌓이는 방식, 사람이 머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죠.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21세기에는 어떤 건축이 시대를 이끌게 될까요?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듯, 20세기 모더니즘 건축과 전후 세계를 복원하기 위해 등장했던 브루탈리즘이 최근 다시 주목받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구마 겐고는 21세기 건축을 이끄는 것은 ‘중심’이 아니라 ‘변경’이라고 말합니다. 중앙에 편승하지 않고, 주변에서부터 시작하는 작고 유연한 시도야말로 미래를 만들어간다고 믿습니다.
2009년, 런던의 왕립건축가협회(RIBA)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런 건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 불황 덕분입니다.” 그 배경에는 ‘위기라는 게 눈앞에 있으면 건축가는 모두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21세기는 또 다른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 모든 불확실성과 혼돈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문 앞에 서 있는 철학이 바로 ‘약한 건축’입니다.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 주변과 어우러지며, 자연과 함께 사라질 수 있는 건축. 이제 구마 겐고는 한국 활동을 시작으로, 이 땅에서 ‘약한 건축’의 가능성을 새롭게 탐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가는 건축은 오늘의 우리에게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당신이 머무르고 싶은 건축은 약한가요, 강한가요?”
※ 해당 콘텐츠 중 구마 겐고의 ‘약한 건축’에 대한 내용은 『나, 건축가 구마 겐고』(구마 겐고 지음)를 참고하였습니다.
※ 본 콘텐츠는 『나, 건축가 구마 겐고』의 출판사 ‘안그라픽스’와의 협의를 통해 제작되었으며, 출판사의 검토를 거쳐 승인받은 내용입니다.
※ 해당 컨텐츠는 (주)엘엑스하우시스에 귀속되며, 무단으로 이용할 경우 법적 책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 해당 컨텐츠의 내용은 필자의 주관적인 의견으로 (주)엘엑스하우시스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 해당 컨텐츠 내 이미지는 Shutterstock에서 유료로 제공받아 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