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조에서 장식으로, 시대를 관통한 아치의 변주
[목차]
01. 아치의 원리: 돌을 공중에 띄우다
02. 로마, 반원 아치로 제국을 짓다
03. 고딕, 첨두 아치가 바꾼 공간
04. 이슬람, 아치가 장식이 되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보를 얹는 것은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입니다. 하지만 보는 가운데가 쳐지기 쉽고, 길어질수록 더 심하게 휘는 단점이 있었죠. 넓은 공간을 만들려면 기둥을 촘촘히 세우거나 보를 더 크고 두껍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둥근 반원 형태의 아치는 이 문제를 다르게 해결합니다. 곡선 형태가 위에서 내려오는 무게를 양쪽으로 흘려보내 직선의 보보다 더 큰 무게를 버틸 수 있었습니다. 돌이나 벽돌처럼 쌓아올리는 재료는 특히 아치와 궁합이 좋아 오랜 시간 여러 문명에서 활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치는 정확히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곡선이 만들어낸 건축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01. 아치의 원리: 돌을 공중에 띄우다
아치는 쐐기 모양으로 깎은 돌들을 곡선을 따라 쌓아 올립니다. 가장 윗쪽 중앙의 마지막 돌인 키스톤을 끼워 넣으면, 돌들이 서로를 밀어내면서 균형을 잡으며 아치는 스스로 서게 됩니다. 완성된 아치 위의 무게는 곡선을 타고 양쪽 끝으로 흘러갑니다.
아치의 특징은 무게가 곧장 아래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비스듬하게 흐른다는 것입니다. 아치의 양쪽 끝에서는 바깥으로 밀어내는 힘이 생깁니다. 이 힘을 받아주지 못하면 아치는 벌어지며 무너집니다. 그래서 아치에는 항상 지지벽이 필요합니다. 아치의 모양에 따라 힘의 흐름도 달라집니다. 반원형 아치는 양옆으로 미는 힘이 크지만, 뾰족한 아치는 힘이 더 아래쪽으로 향합니다. 건축가들은 이 원리를 이해하고 시대와 재료, 목적에 맞춰 아치의 형태를 골라 사용해왔습니다.
02. 로마, 반원 아치로 제국을 짓다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인류가 최초로 아치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본격적으로 아치를 체계화하고 대중적인 건축 형태로 만들어 적극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시대부터입니다. 로마 제국은 기하학적으로 단순하고 시공이 명확하며 구조적으로 안정적인 반원 아치를 사용해 다양한 건축물을 지었습니다.
로마의 석재 아치는 정밀한 석공 기술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각각의 돌은 정확한 각도로 깎여야 했고, 중심점으로부터 일정한 반지름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아치 설계를 표준화한 덕분에 로마에서는 대규모 건설이 가능해졌습니다. 원형 경기장들은 여러 층에 걸쳐 수십 개의 아치가 반복되는 구조로 지어졌고, 계곡을 가로지르며 물을 운반하는 수도교들은 2단, 3단으로 쌓인 아치 구조로 수십 킬로미터를 흐르는 물길을 지탱했습니다. 크고 작은 아치들이 서로를 지지하며 쌓아올려진 이 구조물들은 모르타르 없이 돌의 무게만으로 결합되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로마의 아치 시스템은 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어 유럽에서 북아프리카, 중동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표준화된 기술은 로마 이후에도 건축의 기본 문법으로 이어져, 아치는 서양 건축 전체의 공통 언어가 되었습니다.
03. 고딕, 첨두 아치가 바꾼 공간
중세에 들어서며 12세기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서는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열망으로 건축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더 높이, 더 하늘 가까이 솟아오르는 건물을 짓고자 했고, 이는 반원 아치의 형태를 변화시켰습니다. 반원 대신 두 개의 호가 만나 뾰족한 꼭짓점을 가지는 첨두 아치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첨두 아치는 무게를 더 수직으로 내려보내 벽에 가해지는 옆으로 미는 힘을 줄여주었고, 결과적으로 벽을 더 얇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고딕 건축에서 첨두 아치를 응용한 천장의 석재 뼈대들은 건물의 무게를 모서리 기둥으로 모아 지면으로 전달합니다. 이때 건물의 바깥 방향으로 기둥을 밀어내는 힘이 생기게 되는데, 기둥이 벌어지지 않도록 건물 바깥에 반아치 형태의 구조물을 덧대어 건물을 안쪽으로 밀어줍니다. 이 구조물을 플라잉 버트레스라고 부릅니다. 이로써 고딕 건축은 이전 시대가 상상하지 못했던 높이와 개방성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스템에서 벽은 무게를 받치는 역할에서 해방됩니다. 벽이 얇아지자 창문이 커질 수 있었습니다. 빛은 곧 신의 은총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첨두 아치를 사용한 교회의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벽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내부 공간은 색색의 빛으로 채워졌습니다. 이 빛의 건축이 고딕 성당의 핵심이었습니다. 첨두 아치가 만든 효율성은 결국 종교적 경험을 위한 공간적 조건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04. 이슬람, 아치가 장식이 되다
이슬람 건축에서 아치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7세기 중동에서 시작된 이슬람 문화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8세기에 이베리아 반도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치는 구조적 필요를 넘어 장식적, 상징적 요소로 변모했습니다.
기독교와는 달리 이슬람교에서는 인물이나 동물 형상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했기 때문에 건축 장식은 기하학적인 패턴, 서예, 식물 문양으로 발전했습니다. 아치는 이런 기하학적 장식을 구현하기에 완벽한 요소였습니다. 반복과 대칭, 변주를 통해 무한한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었죠. 또한 모스크는 많은 신자들이 함께 예배하기 위한 넓은 수평 공간이 중요했기 때문에, 극한의 높이보다는 주어진 구조 안에서 시각적 풍요로움을 추구했습니다.
가장 특징적인 형태는 말굽형 아치입니다. 반원보다 더 길게 늘어진 곡선이 기둥 아래쪽까지 이어지는 형태로, 시각적으로 더 긴 수직성을 만들어냅니다. 중세 이슬람 대모스크의 기도실들은 이런 말굽형 아치들이 반복되며 숲처럼 펼쳐집니다. 이는 단순한 구조의 나열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하나의 패턴으로 만드는 건축적 전략이었습니다.
아치의 곡선을 활용해 꽃잎처럼 꾸민 다엽형 아치는 구조적 필요보다는 시각적 풍부함을 위한 변주였습니다. 이 아치들은 종종 교차하거나 중첩되며 레이스처럼 섬세한 개구부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슬람 건축에서 아치는 개별 요소가 아니라 전체 입면을 구성하는 패턴의 단위가 되었습니다.
재료도 달랐습니다. 로마와 고딕의 석재 대신 이슬람 건축은 주로 벽돌을 사용했습니다. 작은 단위의 벽돌은 복잡한 곡선 구현에 유리했고, 표면을 타일이나 회반죽으로 마감해 화려한 장식을 더할 수 있었습니다. 이슬람 건축에서 아치는 공간을 나누고 리듬을 만드는 건축 언어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아치는 하나의 구조 원리에서 출발해 각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변주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의 건축에서도 아치는 여전히 훌륭한 건축 구조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아치형 지붕과 교각이 그 예입니다. 인테리어에서는 공간과 공간을 부드럽게 잇기 위해 개구부에 아치 형태를 적용하기도 합니다. 곡선이 주는 효율과 경험은 재료와 기술이 바뀌어도 여전히 건축의 중요한 도구로 남아 있습니다.
※ 해당 컨텐츠 중 로마 건축에 대한 내용은 <박열. "고대로마건축과 포졸라나". (2016)>를 참고하였습니다.
※ 해당 컨텐츠 중 중세 고딕 건축에 대한 내용은 <신현숙. "근·현대 건축에 나타나는 고딕건축의 영향에 관한 연구". (2004)>를 참고하였습니다.
※ 해당 컨텐츠 중 이슬람 건축에 대한 내용은 <손광호. "이슬람 건축의 공간구성과 표현방법 연구". (2006)>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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