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x3 격자가 건축의 기본 언어가 된 이유
[목차]
01. 질서의 언어 : 나인 스퀘어 그리드란?
02. 르네상스에서 모더니즘으로: 그리드의 역사적 계보
03. 현재진행형인 나인 스퀘어: 오늘날의 공간 디자인
04. 정밀함에서 유연함으로: 확장된 그리드의 의미
한글이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듯이, 건축에도 이를 구성하는 기본 언어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3x3 격자 구조로 이루어진 ‘나인 스퀘어 그리드(Nine-Square Grid)’라는 개념입니다. 단순한 격자 형태이지만, 그 안에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동안의 건축적 사유와 실험이 담겨 있습니다. 불과 몇 개의 직선만으로도 건축가가 공간을 생각하고 조직하는 방식을 드러낼 수 있는 셈인데요. 이 글에서는 나인 스퀘어 그리드가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전해왔는지, 그 철학이 오늘날의 공간 디자인에 어떤 영감을 주는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01. 질서의 언어 : 나인 스퀘어 그리드란?
건축가들은 단지 눈에 멋진 형태의 건물을 짓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공간을 구성하는 ‘질서의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입니다. 건축의 시작은 언제나 선 하나, 점 하나에서 비롯되는데요. 우리가 생각을 정리할 때 노트를 펴고 줄을 긋듯, 건축가들도 공간을 구상할 때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그리드(grid)’, 즉 격자 구조를 활용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도구가 바로 나인 스퀘어 그리드(Nine-Square Grid)입니다. 말 그대로 정사각형을 3×3으로 나눈 아홉 개의 칸입니다. 이 심플한 도식 안에는 건축의 핵심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중심과 주변, 닫힘과 열림, 구조와 비례, 긴장과 균형 같은 개념이 이 작은 격자 속에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1950년대, 미국의 건축가이자 교육자였던 콜린 로우(Colin Rowe)와 존 헤이덕(John Hejduk)은 이 9칸 구조를 건축 교육에 도입했습니다. 그들은 “건축은 벽과 기둥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공간을 구성하는 사고를 배우는 일이다”라고 강조했는데요. 그렇게 나인 스퀘어 그리드는 건축적 사고를 훈련하는 일종의 ‘철학적 장치’가 되었습니다.
이 격자의 힘은 제약에서 비롯됩니다. 제약은 무작위가 아닌 규칙을 만들어내고, 그 규칙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중심 칸을 비워둘지, 채울지, 주변 칸을 서로 연결할지 단절할지 같은 아주 작은 선택만으로도 전혀 다른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나인 스퀘어 그리드는 건축의 외형보다 ‘사유의 질서’를 배우게 하는 하나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02. 르네상스에서 모더니즘으로: 그리드의 역사적 계보
나인 스퀘어의 개념적 뿌리는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콜린 로우는 1947년 논문 〈이상적 빌라의 수학(The Mathematics of the Ideal Villa)〉에서 근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빌라 가르슈(Villa Garches)와 르네상스의 대가 안드레아 팔라디오(Palladio)의 빌라 말콘텐타(Villa Malcontenta)를 비교했습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과거의 건축과 지금의 건축은 정말 완전히 다를까?”
놀랍게도 두 건물은 400년의 시간 차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리듬, 비례, 중심축의 구조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로우는 이를 통해 근대 건축이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실상 르네상스의 고전적 질서를 현대적으로 변주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근대 건축의 ‘혁신’이 사실은 르네상스의 질서 위에 세워졌다는 거죠.
이 생각은 존 헤이덕(John Hejduk)의 교육 철학으로 이어졌습니다. 헤이덕은 학생들에게 9분할 그리드를 주고, 그 안에서 기둥과 보, 벽과 창, 중심과 주변을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해보게 했습니다. 결과물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형태를 만들어내는 사유의 과정, 즉 그 안에 존재하는 질서와 논리를 이해하는 일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단순한 네모 속에서 수많은 공간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어떤 학생은 중심을 비워둠으로써 ‘비어 있는 건축’을 사유하고, 또 다른 학생은 비례를 깨뜨리며 ‘불균형 속의 질서’를 탐구했습니다. 이 단순한 네모 도식은 건축을 ‘짓는 일’에서 ‘생각하는 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03. 현재진행형인 나인 스퀘어: 오늘날의 공간 디자인
텍사스에서 시작된 이 작은 실험은 곧 미국과 유럽으로 퍼져나갔습니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며 이 도식은 여러 건축가들에 의해 다양한 해석을 얻었습니다. 베르사유 건축학교에서는 학생들이 9칸의 평면을 바탕으로 고전 건축의 구조와 축선을 배우고, 겐트 대학교에서는 같은 9칸을 이용해 완전히 새로운 건축 형태를 상상하는 실험이 이어졌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주어진 틀 안에서 스스로의 규칙을 만드는 연습을 했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빌라 부겐하우트(Villa Buggenhout)입니다. 이 주택에서는 모든 방의 크기가 동일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부엌, 거실, 침실, 욕실의 크기가 같다면, 공간의 기능은 더 이상 고정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생활의 규칙’은 공간이 제시하는 제약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사용자의 움직임과 선택이 공간의 의미를 바꾸는 실험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나인 스퀘어는 도면 위의 연습에서 나아가, 사유의 방식을 훈련하는 구조, 그리고 삶과 공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플랫폼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04. 정밀함에서 유연함으로: 확장된 그리드의 의미
초기의 나인 스퀘어는 매우 정밀한 시스템이었습니다. 기둥 간격, 패널의 크기, 구조의 비례가 엄격히 정해져 있었죠. 이 구조적 엄밀함은 르네상스적 질서와 모더니즘의 합리성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정확함의 언어’는 점점 더 유연한 사고의 틀로 변해갔습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 알고리즘과 디지털 모델링이 도입되면서 그리드는 한층 복잡하고 역동적인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과거처럼 모든 요소가 고정된 규칙에 따라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환경, 사용자의 행동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는 ‘움직이는 질서’로 작동합니다. 그리드는 선과 면을 구획하는 틀에서 변화를 설계하는 프레임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이 변화는 공간의 언어를 근본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전통적 그리드가 ‘비례와 치수’를 제공했다면, 오늘날의 그리드는 적응과 변화를 위한 프로토콜로 기능합니다. 디지털 도구와 모듈형 시스템, 가변형 벽체 같은 기술과 결합하면서, 고정된 규칙은 분해되고 재구성됩니다.
나인 스퀘어 그리드는 그저 아홉 개의 칸이 아닙니다. 이는 건축이 세상을 이해하고, 사고를 구조화하며, 질서를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시대가 변할수록 나인 스퀘어 그리드의 의미는 새로운 모습으로 확장되어 왔습니다. 르네상스의 비례와 조화, 모더니즘의 추상과 합리성, 그리고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유연함과 상호작용까지, 이 작은 격자 안에는 건축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질서는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변화할까?” 이 질문이 이어지는 한, 나인 스퀘어 그리드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 해당 컨텐츠 중 나인 스퀘어 그리드에 대한 내용은 <“The Nine-Square Grid — The Surviving Image of an Architecture without Content”(『Architectural Histories』, (2021)>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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